내가 읽은 책

드워킨 정의론 - 잘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저 그 하루 2021. 2. 1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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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독서 포스팅이다.

방학동안 평소에는 읽어보지 못할 두껍거나 어려워보이는 책을 읽자고 다짐하고 나서 이 책이 두번 째 인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한 책이다.

책의 이름은 정의론. 다양한 철학자들이 정의론을 작성했는데 내가 읽은 것은 드워킨이 적은 정의론이다.

 

 

드워킨은 자유주의를 가장 강조하면서 그 안에서의 도덕개념들을 해석적으로 접근하며 각자의 선택에 있어서의 타당성을 많이 부여해주고자 하였다.

 

원서는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이라는 이름이었다.

왜 고슴도치일까 생각해보면 약하지만 가시로 자신을 잘 감싸며 보호하고 있는 혹은 여기저기 찔르고 다니는 모습을 생각하며 고슴도치처럼 살기 위하여 필요한 정의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잘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이 자주 등장한다. 잘 사는 삶과 좋은 삶을 구별하며, 잘 살았다 하더라도 좋은 삶을 못 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당연하지만서도 마음 속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드워킨

 

정의론에서 읽었던 인상깊었던 내용을 퍼왔다.

 

-      나는 도덕적 또는 윤리적 회의주의를 거부하지 않으며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르키메데스적 회의주의를 거부한다..

(아르키메데스적 회의주의: 회의주의의 근거가 도덕이나 윤리에 있음을 부인하는 회의주의)

 

-      회의주의와 불확실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불확실성은 기본상태이다. 회의적 주장을 하기위해서는 실체적 도덕적 입장만큼 강력한 논변이 필요하다.

--> 긴가민가함과 회의주의를 잘 구별해야 한다.

 

-      객관적 윤리적 진실이 존재하며 무조건적 이유도 존재한다 믿고 그렇게 주장할 것이다.

--> 어떤 것이 옳다고 특정해놓지는 않지만, 어떠한 더 나은 것이 있음을 존재한다고 믿었다.

 

-      당신이 어떻게 현재 입장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그 입장의 진실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도덕적 신념이 우연적으로 참일 경우—동전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와서 간 강연이 나의 생각을 바꿨을 때)

--> 우연적인 결과로 나의 생각이 바뀌었을 때 나의 신념의 근거를 어떻게 대면 좋을까

 

-      우리는 현재의 견해가 발전이라는 독립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도덕적 진실이 진보에 기여했다는 설명을 할 수 있고, 이미 이 독립적인 판단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의미를 내포한다.

 

-      어떠한 신념이 우리의 다른 신념들에 부합하고 통일성을 이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스스로 그 신념을 받아들이려는 의욕을 일으킬 수 없다.

--> 개별 신념에 대하여 우리는 각각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들이 갈릴 때에는,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의 면들을 본다는 것보다 충돌을 본다고하는 것이 더 낫고 유익한 진단인 경우가 많다.

--> 다양한 시선의 유의미함 보다는 개선해야될 요소로 하나의 통일된 주장으로 정리하고자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      가치에 의거한 설명은 우리가 그 모든 복합성과 논란, 언표 불능성에 직면해서도 진리에 관해 지니고 있는 확신을 구제한다.

 

-      우리의 본래적 목표는 뭔가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

 

-      당신의 생각이 그것을 옳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때 당신이 그것을 옳은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      우리가 어떤 정의관을 옹호하는 수단은 정의 개념의 관행과 패러다임을 우리의 정의관을 지지하는 여타 가치들의 더 광범한 네트워크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여타의 가치들을 탐험하면서 우리 논변을 이렇게 확장시키는 일은 내가 이야기했듯 논변이 자기 자신에 부응할 때가지 원칙상 계속할 수 있다.

 

-      우리는 도덕적 개념들이 해석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은 대부분 개념들을 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도덕적 개념의 정의는 언제나 도덕적 해석의 하나이기 때문에, 어떤 정의도 불가피하게 논란적일 수 밖에 없다.

 

-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진리란 탐구에서의 성공” 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정식에 의해 배제되어 있다.

 

-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람은 타인에게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현존의 좋음”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      우리는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좋은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      어떤 이는 담대하게 도전했다가 실패함으로 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삶을 살 수도 있다.

 

-      삶을 가장 잘 해석하려면 (즉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각자의 삶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어떤 성과가 삶에 수행가치를 부여할지에 대해 분명치는 않지만 강력한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

 

-      존엄성은 자신의 행위를 소유하도록 요구한다.

 

-      자신의 삶이 보여 줘야 하는 가치와 목표에 대한 판단이 다른사람의 판단에 의해 대체된다면 그의 진정성은 손상을 입게 된다.

 

-      진정성의 주창자들이 왜 객관적 가치의 인식 가능성을 거부하기에 고심했는지 왜 객관적 가치를 신화로 치부하며 진정성을 대안으로 제시했는지 의아하다

 

-      무신론자들도 다음과 같은 극적인 질문에 대면한다. “ 인간은 어떻게 그와 우주와의 관계 전체를 개인의 삶에 반영할 수 있을까?--> 대답 3가지 1. 그런 시도를 하지않아도 불완전하지 않은 삶이다. 2. 인본주의- 개인의 삶을 종 전체의 연혁 속 또는 생명이 미약한 시작에서 진화해 나가는 역사 속의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 3. 인간이라는 생명을 우주의 진화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치부

 

-      규정론을 믿는 사람들 중 인간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 모순에 빠져있다. 범죄자를 이런 규정론에 옹호하는 변호사를 예를 들면 아무도 평가상의 책임이 없으니 범죄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공직자도 책임이 없고, 공직자의 행동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이다.

 

-      능력의 원리= 우리의 의식적인 결정들은 원칙적으로 그 자체는 진정한 사실이며 잘사는가의 문제는 그 결정이 얼마나 좋은 결정인가에 달렸다. 능력의 원리가 거짓이라는 근거를 들어 사람들이 규정된 대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해결을 유예하는 것이다.

 

-      비관적 양립 불가주의자들은 우리가 지적 장애인 범죄자들에게 책임이 없으므로 용서되어야 함을 받아들이면, 모두가 같은 상황이므로 우리 모두가 면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보통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와 중독자들의 행위의 인과적 연혁에 차이점이 인지된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      능력 원리는 사람이 자신이 행동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참이고 의미 있는 인지를 할 능력이 충분치 않다면 의미 있는 통제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      어떤 범죄학자들은 과학이 누구에게도 자유 의지가 없음을 입증했으므로 그 누구도 처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      우리가 이런 상황에 대해 책임을 감면해야 할 유혹을 느끼는 것은 강압과 빈곤이 부정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며 그러할 때만 그런 유혹을 느낀다는 것이다.

 

-      과연 당신의 삶이 단지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갖지 못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      니체의 초기 대면인 차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사람들에게만 말하지 않았고, 그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이에게 그가 얼마나 비관적이었든 간에, 마지막 인류가 아닌 차세대 인류가 되길 희망하는 모든이에게 말했다.

=니체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가장 중요시 생각했다.

 

-      니체는 또한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이러한 가치가 오직 도덕적 의무에 기한 삶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칸트주의자들을 비웃었다.

 

-      니체가 보통의 도덕성을 증오하는 것은 비록 모든 이들이 잘 살 수는 없을지라도, 모든 이들이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제를 오히려 강조해 준다.

 

-      타인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칸트의 원칙은 어떤 함의가 있을까?

 

-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발견하는 가치가 진정 객관적이라면, 그것은 인류의 가치 그 자체여야만 한다.

 

-      선호가 그 타인의 삶이 당신의 삶만큼 객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어떠한 근거에 의한 선호는 인류 존중이 배척된다.

 

-      복지 안녕 그리고 좋은 삶 같은 것은 해석적 개념이다.

 

-      내게 다른 우선순위가 있을 수 있다.

 

-      우리는 피해자의 위험과 필요를 측정할 때, 피해자가 자신의 계획과 포부에 비추어 그 위험과 필요를 얼마나 나쁘게 파악하는지를 묻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포부든 추구할 수 있는 통상적인 기회들이 그 피해자로부터는 얼마나 심하게 박탈되었는지를 파악하여 객관적으로 측정해야 한다.

 

-      결과가 아니라 권리에 중심을 두고 결정을 내린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기계적으로 당연하지 않다.

-      우리가  취하는 해석적 기준에 따르면 당신의 아내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당신의 특별한 책임으로 족하고, 그 외의 이유는 필요 없다.

 

-      많은 결과주의자들은 오히려 살인 행위와 죽게 방치하는 행위의 잠정적 동등성에 의존하는 것을 다른 맥락에서 환영한다.

 

-      우리가 경쟁함으로 발생하는 위해는 불가피하며 허용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개인의 책임 중 일부다.

 

-      약속이 의무를 생성한다고 상정하지 않고는 약속을 받는 사람은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만일 낯선 사람들에게 보이는 관심보다 더 큰 관심을 그 사람 자체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천한 도구적 관계일 뿐이다.

 

-      우연히 태어난 국가의 법에 우리가 복종해야 할 책무가 있는가?

 

-      해당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 이상 그 공동체의 법에 복종할 책무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는 한때 인기 있었던 발상은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 너무 유치하다.

 

-      어떤 자발적 책무도 그 뒤에는 비자발적 책무가 놓여 있다.

 

-      집단적 강압적 정부는 우리의 존엄성에 필수적이다.

 

-      법과 정책들이 개별 국민들의 운명은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합리적 해석이 가능하고, 법과 정책들이 개별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합리적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 그 정부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      정치 공동체의 정책들이 사람들의 운명을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시민 각자의 책임을 존중하지 않는 한, 그 정치 공동체는 그들에게 부과될 책무를 창출하고 강제할 어떠한 도덕적 힘도 갖지 못한다.

 

-      자유와 평등은 상충하는 가치라는 견해를 거부해야 한다.

 

-      인권은 종교적 기초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오래된 것이다.

 

-      자신들의 신이 자신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만을 또는 그 종교의 충실한 신자들이 지닌 특정한 종족적 혈통만을 배타적으로 또는 주로 총애한다는 생각은 그 신이 보편적인 도덕적 권위를 지닌다는 가정을 뒤엎어 버린다.

 

-      가치의 영역에서 우리 자신의 신념 위에 발을 딛고 서야 하지만, 그 주장이 참인 근거로 종교나 신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 타인에게 부과하는 비용, 그리고 자신이 당하는 기회의 상실가지 반영해야 한다.

 

-      각자의 윤리적 책임을 존중하는 공동체는 정치적 합의물을 확정할 때 수단의 공정한 분배에 치중해야 한다.

 

-      정부는 타인의 생명, 안전 또는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한 근본적 독립성은 어떤 이유로도 제약해서는 안 된다.

 

-      환경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 유기적으로 창설되는 것이지 정치적 다수가 자신들의 결정을 타인들에게 강요해서 창설되는 것이 아니다.

 

-      많은 나라의 조세가 부정의한데 그 이유는 너무 많이 걷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걷기 때문이다.

 

-      낙태에 관한 판단은 특정 상황에서 옳든 그르든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임은 변함이 없고, 여성들에게 판단은 맡겨져, 그들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만큼 각자가 자신의 윤리적 신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쟁을 포기하고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좋은지 논하자고 주장하는 일부 철학자들의 환원적 전략은 자멸적이다.

 

-      머릿수를 세는 식의 다수결주의적 원칙이 공정성의 근본 원칙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      다수자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올바른 공동체가 아니라면 다수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전혀 도덕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없다.

 

-      어떤 삶이 나에게 좋은 삶인지를 숙고할 때 나는 내 처지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해야 한다. 즉 문화, 배경, 재능, 기호 그리고 내가 충성해야 할 대상들과 같이 나의 대응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과, 그런 질료들로 최선의 삶을 성취하기 어렵게 만드는 제약들을 구분해야 한다. 질병과 신체적 장애는 제약이지 질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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