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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폭풍의 시작
설날에 대학원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전달하였다.
그만두면 뭐할거냐는 물음에
'돈 모아서 여행떠나고 블로그나 유튜브로 여행자금 보태며 여행할 수 있는만큼 하고 오겠다.
잘되면 안 돌아오고 잘 안되면 돌아오고...'
모르겠다. 내가 전달을 잘 못한건지 부모님은 내가 여행으로^만^ 먹고 살겠다는
얘기로 들었으려나 아님 잘 들었어도 이게 무리한 요구였으려나
아무튼 부모님은 입으로는 한숨 뒤로는 걱정 앞으로는 황당함
사실 나도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계획이 세부적으로 짜이지 않았으니까
매순간 뭐라도 열심히 하고있으면 뭐든 될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에
계획을 현실성 따지면서 짜보진 않았기 때문이다.
(2023.03.19) 지금 생각해보면 나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고, 약했던 시기이다. 좀 더 명확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고 속상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자신도 생겼고 응원해주지 않아도 떳떳하다
이 때부터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3년 갔다 와서 뭘하든 할텐데 왜들 이렇게 난리지?"
지금도 사실 의문이다. 걱정이라고 하기에는 뭘 걱정하는걸까
나도 부모가 되면 자식의 걱정을 정말 자신의 일처럼 하게 되는걸까도 생각이 들었고
그냥 응원하는게 속편하지 않나 생각도 들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2023.03.19) 이 부분에서는 여전히 같은 생각이다. 어찌되든 응원해주고 보살펴주는게 부모가 아닐까? 잘 못했을 때 돌아올 책임을 걱정이란 이름으로 치부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똑같은 강도와 언행으로 자식이 부모의 앞날을 걱정하는 소리를 한다면 그만큼 효력이 있고 걱정해주는 효자로 생각할까 고민해본 결과이다.
활화산
아빠는 이미 활화산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대화도 하려하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잠잠하다가도 뭐할지 얘기만 나오면 울그락불그락
"허황된 소리" "놀고먹을 심보"
엄마는 나름 안정적인 직장갔으면 하는 바람에 벗어나서 아쉽다 라고 말을 해줬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왜 26살이 되도록 이런 말을 듣고 있을까? 생각이 든다.
가족들이 걱정해주는 것도 고맙긴한데 그만큼 신뢰도 못 준것 같고
능력도 없어보이나 싶었다.
이 부분에서는 아빠의 얘기가 많이 기억에 맴돈다.
사실 아빠는 대화라기보다 의문을 던져놓고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에 대화를 끝까지 해본적이 없다.
"고생하지말라고 대학까지 보냈더니 왜 이제와서 그러냐"
이 질문에 답을 좀 더 자세히 남겨두자면
일단 나는 그 고생이란게 좀 하고 싶은 것 같다.
똑같은 경험 속에서 살기는 너무 아까운 젊음이 아닐까?
고생을 안 해서 속이 불렀다고할 수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싶은거지 고생이 아니었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대학원도 가니까 이제서야 내가 하려던걸 시작할 용기가 대뜸 생긴걸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하려는 일로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줄 아냐" or "놀고 먹으려는 심보"
전자는 내가 전업으로 삼는다고 착각하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사실 몇차례 얘기를 했는데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았다. 돈쫓아서 무리한 짓 할거라고 오히려 더 와전되어 전달된 적도 있다.
나의 말하기에 상당히 문제가 있는듯 하다.
"놀고먹으려는 심보"는 결국 모든 일이 놀고먹으려고 하는 건데 놀고먹는게 돈이되면 얼마나 좋을까
왜 시도조차 못하게 막는지 이건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직장을 왜 바랄까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이거를 우선 명확하게 정립하고 싶다. 정말 끝없이 달려오는 10대와 20대 초반이었다.10대에는 공부한다고 게임한다고 나를 돌보지 못했고20대에는 이제 대학생이라고 노느라 나를 돌보지 못했다.이제 진짜 나와 대화할 시간이 아닐까?
나도 여행을 다녀와서 경제적 자유를 얻기전까지는 고정적 수입원 없이 살진 않을 것이다.
대학원을 그만둔건 여행자금을 빨리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관련일을 안 할거란 다짐과 함께
나온 것이었다. 좀 더 타이트하게 밀어붙이기 위해서랄까
설날이니 친척들과도 장기간의 대화끝에 뜨듯미지근한 결론으로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자퇴하지 않고 한 학기 휴학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여행은 엄마랑 동남아여행 다녀와보고 생각해보기로
(벌써 3월이다. 나는 아직은 대학원에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설날이 끝나고 대학원 사람들에게도 그만두리라는 사실을 알리는 중에
부모님에게 전화가 왔다.
이 때 우리 부모님은 레드향 농사를 지었는데, 설날 제수용 수확이 끝나고 남은
작은 크기의 레드향 수확을 도와달라는 연락이었다.
고민이었다.
한 달을 서울에 있을지 (그만두는 것을 다 알리기 전)
그냥 내려가서 농사를 지을지
고민 끝에 마무리하고 제주도에 농사를 도와주러 갔다.
시급은 만원 아들버프로 숙식제공까지
근데 나는 아직도 이 선택을 후회한다.
농사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나만큼 일을 자주 돕진 않았지만 마찰도 잦았다.그리고 내 성격상 나는 상처를 오랫동안 품고 가기 때문에 밭에 가는 것은 일 그 이상의 의미였다.더군다나 지금 시기는 안 좋은 격변의 시기 아닌가...그래도 돈을 받는다는 보상에 집중하기 위해 그리고 일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사실 이 글을 읽으면 내가 오바를 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내 소심함과 오랜 누적의 결과랄까..) 일을 하는데 항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마찰은 중간중간 있었고 나는 다시 포기했다.
' 아 돈을 받아도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다른 곳에서 일하면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겠어'나는 이 생각을 부모님에게 말했다.
부모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바로 사과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닌 상황에 대한 개선이 필요했다.
단호하게 나가자 분노로 바뀌었다.
나는 항상 이 단계가 아리송하다.
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그만돕겠다가 원망이 되는걸까
이 시기는 주거로 협박을 당하던 시기였다.
알바로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아니까 집에서 지내는 것에 돈을 지불하라셨다.
내가 농부도 아니고 대학원에 그만두고 내려와서 이 일만 해야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이 당시에는 화가 정말 많이 나고 우울했었다.
(이런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심리학 고수겠지?)
속 좁은 pickle
나는 서울로 갔고 부모님은 내가 다시 제주도에 오면 기분을 풀겠지 생각했다.
기분이 풀려서 다시 일하러 갈 생각도 없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인데
가족의 그늘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냥 부모님은 그런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해도
전화를 할 때 마다 혹은 얘기를 할 때 마다 싸운 시기가 2 주 정도 된다.
농사짓는 집은 다 이런가보다.
없으면 없으니 더 있으면 더 있으려고 도움을 받으려는게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밀어붙혔다.
관계는 악화됐다.
부모님도 밀어붙혔다.
친척집에서까지 싸우는 날들이었다.
물꼬는 이상하게 트였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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